2008년 2월에 <도요타식 화이트칼라 혁신>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역자 후기로 적은 글을 올린다. 벌서 10년이 더 지난 일이다. 저 책의 저자는 작고하셨다. 많은 가르침 받았다.
역자 후기
工場(工을 하는 場)에 대한 추억과 이미지를 여럿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역시 학교를 졸업하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기억이다. 당시 나는 기아자동차 입사연수를 마치고, 상용설계부라는 곳으로 배정되었다. 배치된 연구소 내의 설계사무실로 들어가서 다른 입사 동기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인사배치가 잘못됐다며 차량실험부 과장 한 분이 나의 손을 잡고 연구소를 나와 공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배치된 다른 입사 동기를 연구소로 보냈다. 아무튼 이날,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설계를 주로 하는 업무가 아니라, 차량실험부에서 작업복을 입고 스패너와 볼트를 들고 일을 시작해야 했다. 당시 부장님은 나에게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이 보기 싫다며 다 치우라는 명령을 내리셨고, 당장 현장에 가서 퇴근시간까지 사무실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공장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런 緣의 연장선에서 존재하며, 나에게는 두 번째 번역서에 해당한다. 첫 번째로 번역한《모노즈쿠리》(후지모토 著, 월간조선사, 2006)는 도쿄대학 경제학과 교수라는 아카데믹한 맛이 다분히 흘러넘치는 분의 일본 제조업에 대한 전략서였다. 그때에는 저자의 대뇌 회로 구성을 열심히 헤아려가며 번역에 임했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평생을 일본의 제조업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기름진 손으로 작업을 하고, 설계도면을 검토하기 위해 담배 몇 갑을 줄담배로 피워가면서 연기 자욱한 회의실 속에서 생활하신 분들이다. 그렇기에 저자들의 온몸에 존재하는 수많은 근육과 신경세포, 깊은 숨결을 헤아려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있는 수많은 공백을 겨우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공장의 이야기만을 적은 것은 아니다. 저자들이 체험한 공장의 개선․개혁을 기초로 화이트칼라에게 이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최근 많이 나와 있는 도요타 관련 서적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함에 있어 가장 애를 먹었던 단어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見える化’, ‘視える化’, ‘観える化’라는 단어로, 다 같이 일본어로 미에루카みえるか라고 읽는다. 보통, 도요타 관련 용어로 사용되는 見える化는 ‘문제를 드러내기’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낭비를 드러내는 수준, 즉 낭비를 보는 레벨을 3단계로 나누어서, 공장부문(직접부문)에서 비교적 문제를 드러내기 쉬운 낭비를 드러내는 것을 見える化, 비교적 찾기 어려운 낭비를 드러내는 것을 視える化,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문제의 본질을 보이게 하는 것을 観える化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각각 ‘구현화’, ‘주시화’, ‘관조화’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구현이란, 어떤 내용이 구체적인 사실로 나타나게 한다는 의미이며, 주시는 어떤 일이나 목표물에 온 정신을 모아 자세히 살펴본다는 의미, 그리고 관조는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춘다는 의미를 가지기에,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일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가장 곤란함을 야기한 단어가 낭비라는 단어였다. 일반적으로 도요타 생산 시스템에서 말하는 낭비는 가타카나로 ムダ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비교적 찾기 쉬운 낭비를 가타카나로 ムダ라고 표현했고, 비교적 찾기 힘든 낭비를 히라가나로 むだ라고 구분해서 적고 있다. 이를 고심하다가, 가타카나의 낭비ムダ를 한글로 ‘낭비’라고 적었고, 히라가나의 낭비むだ를 한자로 ‘浪費’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옮긴 것은 한글로 낭비를 적으면 금방 눈에 띄고, 한자로 浪費를 적으면 눈에 띄지 않아 찾기 힘들다는 의미에서다. 이렇게 번역을 해놓고 난 뒤 우연히 도요타 관련 서적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낭비의 수준을 3단계로 나누어서 가장 찾기 쉬운 낭비를 ムダ, 중간 정도를 むだ, 가장 찾기 힘든 낭비를 浪費로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번역하면서 생각했었던 단어 활용의 착상과 비슷했기에 안도와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가장 번역하기 힘든 단어는 가장 자주 사용하는, 가장 평범한 용어의 의미 전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 책을 번역함에 있어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먼저, 부족한 시간을 대신하여 일부 초벌 번역 작업을 해주시고 원고를 교정해주신 김경연님, 표와 그림 번역을 해주신 한영호 책임연구원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전문용어의 번역을 차근차근 읽어가며 수정해주시고 의견을 주신 박철우 책임연구원과, 교정 내용을 손수 타이핑하여 옮겨준 육진범 연구원께도 감사를 드린다. 평소 나의 업무를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신 김수옥 책임연구원과 이희대 책임연구원,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추천해주시고, 부족한 나에게 생산 시스템이란 큰 주제를 가지고 경험하고 생각할 기회를 주신 LG전자 생산성 연구원의 이상봉 원장님과 정장우 연구위원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제조현장에서 열심히 묵묵하게 일하시는 수많은 분들과 개선 활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에게 이 책의 말미에나마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2008년 2월
박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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